동독에서 자란 고령자, 서독 출신보다 인지기능 좋아

- 동독의 장기 의무교육·보편적 보육이 인지예비능 형성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

새로운 연구에서는 독일 재통일 전의 사회주의 시대에 동독에서 태어나 자란 고령자는 서독이 자란 고령자보다 인지 기능이 양호하고 정신 기능의 저하가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Gemini_Generated_Image

[IT News] 사회주의 체제였던 동독에서 성장한 고령자들이 서독에서 자란 고령자들보다 기억력과 언어 유창성, 수리 능력, 지남력 등 전반적인 인지기능이 더 양호하고, 나이가 들면서 인지기능이 저하되는 속도도 느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번 연구는 서로 다른 정치·경제 체제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노년기에 어떤 인지적 차이를 보이는지 분석한 것으로, 정치제도와 교육·복지환경이 장기적으로 뇌 건강과 인지 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노화연구(Research on Aging)>에 <논문명: 정치 체제는 인지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가? 동서독의 분단과 통일 사례 및 노년기 인지 건강과의 연관성(Is There a Cognitive Footprint of Political Systems? The Case of Separation and Reunification of East and West Germany and Its Association With Later Life Cognitive Health)>으로 10월 4일 게재됐다.

동서독 체제 차이가 ‘자연실험’ 제공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됐다. 동독은 소련의 영향 아래 계획경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운영했으며, 서독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했다.

두 독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통합 과정을 거쳐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재통일됐다. 연구진은 한 민족과 언어를 공유하던 인구가 수십 년 동안 서로 다른 교육·경제·복지 체제에서 살아온 뒤 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은 사회제도가 인간의 생애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자연실험’으로 평가된다.

기존 연구에서는 동독 출신 주민들이 서독 주민보다 신체 건강이 나쁘고 평균수명도 짧은 경향이 지속적으로 보고됐다. 심혈관질환, 건강행태, 경제적 생활수준 등의 차이가 주요 원인으로 거론돼 왔다. 일반적으로 신체 건강과 기대수명이 낮은 집단은 노년기 인지기능 저하도 더 빠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는 인지 건강에서 정반대 양상이 관찰됐다.

5,231명 대상, 평균 4년 추적

독일 콘스탄츠대학교의 사회학자 아리아네 베르토그와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 보스턴의 노년학자 제프리 E. 스톡스 연구진은 유럽의 고령화 연구 자료인 ‘유럽 건강·고령화·은퇴 조사(SHARE)’를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대상은 1989년 당시 동독 또는 서독에 거주했던 고령자 5,231명이었으며, 참가자들은 평균 4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인터뷰와 인지기능 검사를 받았다.

연구진은 제시된 단어 목록을 기억해 회상하는 즉시 기억력, 제한된 시간 안에 동물 이름 등 특정 범주의 단어를 얼마나 많이 말하는지를 측정하는 언어 유창성, 현재 날짜와 요일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지남력, 100에서 7을 반복적으로 빼는 방식으로 평가하는 수리 능력 등 네 가지 인지 영역을 분석했다.

또한 통계모형을 활용해 참가자별 인지기능 수준과 시간에 따른 변화 양상을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건강 상태와 가구소득, 전체 교육 수준, 어린 시절 자신의 수학·언어 능력에 대한 평가, 가정 내 도서 보유량 등 인지 발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도 함께 고려했다.

4가지 인지검사 모두 동독 출신 우위

분석 결과, 통일 이전 동독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네 가지 인지검사 모두에서 서독 거주자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나이가 들면서 인지기능이 낮아지는 속도 역시 동독 출신 집단에서 더 완만했다.

특히 서독 거주자들은 연구 기간 동안 즉시 기억력과 언어 유창성이 점진적으로 감소한 반면, 동독 거주자들은 해당 능력을 대체로 유지하거나 일부 영역에서 소폭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남력과 수리 능력에서도 동독 출신자의 인지 저하 폭이 상대적으로 작았다.

연구진은 이러한 결과가 동독의 교육·보육 체계와 관련 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동독에서는 서독보다 의무교육 기간이 길었다. 서독의 의무교육이 대체로 8~9년이었던 데 비해 동독에서는 10년 의무교육이 시행됐다. 또한 동독은 국가가 지원하는 보육을 폭넓게 제공했고, 학교 체계 내부의 사회적 분화도 상대적으로 덜했다.

‘인지예비능’이 노년기 차이 만들었나

연구진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교육과 보육을 받은 경험이 노년기의 인지기능을 보호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인지예비능은 뇌가 노화나 질병으로 인한 손상을 받더라도 기존의 지적 활동 경험과 신경 연결망을 활용해 기능을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교육 수준이 높고 지적·사회적 활동이 활발할수록 인지예비능이 더 많이 형성될 수 있으며, 이는 노년기 기억력 저하나 치매 증상 발현을 늦추는 요인으로 연구돼 왔다.

연구진은 서독의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과 더 나은 영양 상태, 시민적 자유가 인지 건강에 유리했을 가능성과 동독의 평등주의적 교육·보육 체계가 인지 건강에 유리했을 가능성을 각각 가설로 설정했다. 분석 결과만 놓고 보면, 적어도 이번 표본에서는 동독의 장기 의무교육과 보편적 보육이 가져온 초기 생애의 이점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일 당시 연령에 따라 격차 달라져

동서독 간 인지기능 차이는 통일 당시 나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기억력과 언어 유창성의 격차는 통일 당시 40대였던 집단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반면 지남력과 수리 능력에서는 통일 당시 20대였던 사람들에게서 동독 출신자의 상대적 우위가 가장 뚜렷했다.

연구진은 젊은 시절 통일을 경험한 동독 출신자들이 기존 교육의 혜택을 바탕으로 통일 이후 더 큰 경제체제와 노동시장에 편입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반대로 통일 당시 40대였던 서독 주민들은 경제 경쟁과 가족 부양 부담이 큰 시기에 사회·경제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통일 당시 이미 은퇴 연령에 가까웠던 사람들에게서는 동서독 간 인지기능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연구진은 교육 경험과 사회체제 변화의 영향이 생애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동독 체제의 부정적 영향까지 상쇄했다는 뜻은 아냐

이번 연구 결과가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가 서독보다 전반적으로 우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주민보다 낮은 생활수준, 제한된 시민적 자유, 비밀경찰과 감시 체계, 낮은 사회적 신뢰 등 여러 부담을 경험했다.

환경적 차이도 있었다. 서독은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 과거 유연휘발유 사용으로 인한 납 노출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컸던 반면, 동독은 산업오염과 열악한 환경조건에 노출된 지역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이러한 환경 독성물질이나 사회적 스트레스가 인지기능에 미친 영향을 직접 측정하지 못했다.

따라서 동독 출신자의 인지기능 우위를 특정 제도 하나의 결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교육 기간과 보육뿐 아니라 직업 이력, 가족 구조, 건강행태, 통일 이후의 경제적 적응, 성별 및 지역 차이 등 다양한 요인이 함께 작용했을 수 있다.

치매 발생률을 직접 확인한 연구는 아냐

연구진은 이번 분석이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 진단 자체를 비교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연구에서 측정한 것은 표준화된 인지검사 점수와 그 변화 추이이며, 실제 의료기록에 기반한 치매 발생률이나 질병 진단을 직접 분석한 결과는 아니다.

인지검사 점수만으로는 신경퇴행성 질환의 모든 양상을 포착하기 어렵다. 일부 고령자는 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유지해 초기 기능 저하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연구진은 향후 알츠하이머병과 다른 치매 질환의 임상 진단, 뇌 영상, 의료기록 등을 장기간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교육과 보육 같은 초기 생애의 공공정책이 수십 년 뒤 노년기의 인지 건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정치체제나 경제체제의 효과를 평가할 때에는 소득과 생활수준뿐 아니라 교육의 보편성, 돌봄서비스 접근성, 생애 단계별 사회 변화까지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김한비 기자 itnews@